[존게디 선교사와 바누아투]
런던선교협회가 1839년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와제임스 해리스(James Harris)를 파송하기 전에 바누아투(Vanuatu;호주 옆 섬나라)에는 그리스도인이 전혀 없었습니다. 윌리엄스 선교사와 해리스 선교사는 1839년 11월 20일 바누아투의 에로망가 섬에 상륙하자마자 그 섬의 식인종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 해로부터 48년이 지난 후에 존 페이톤(John Paton) 선교사가 두 선교사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뉴 헤브라이디즈[현,바누아투]는 이렇게 선교사들의 피로 세례를 받았다.그리스도께서는 기독교 세계 전체에 그 섬들이 그리스도의 섬들이라고 선언하였다“
즉,아네이티움(Aneityum) 섬에서는 1848년에 도착한 존 게디(John Geddie) 선교사와 1852년에 도착한 존 잉글리스(John Inglis) 선교사가 놀라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1854년이 되었을 때는 섬 인구의 절반 이상이 되는 3,500명이 우상들과 이교 관습을 버리고 여호와를 섬긴다고 서약했습니다. 게디 선교사가 1872년 천국으로 가셨을 때는 아네이툼 섬의 주민들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게디 선교사님의 24년의 수고 끝에 1872년 12월 14일 소천하셨을때 시드니에서 준비된 서판이 아네이툼섬의 아넬카하트 마을에 있는 교회 강단 뒤에 놓였습니다.
"1815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John Geddie, DD를 추모하며. 7년 동안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에서 목사로,Nova Scotia에서 Aneiteum 으로 선교사로 파송되어 24년간 섬겼다.그가 1848년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는 기독교인이 없었으나 그가 떠난 1872년 에는 이교도가 남지 않게 되었다."
[존 페이톤(John Paton) 선교사의 경남선교]
-19세기 이후 호주교회는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선교사상 혹은 선교운동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PCV)가 총회 내에 해외선교부(Foreign Mission Committee)를 조직했을 때는 교단이 조직된 이듬해인 1860년이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크게 두개 지역, 곧 지금은 바누아투(Vanuatu)라고 불리는 뉴 헤브리디즈(New Hebrides)와 호주 원주민 선교에 치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50년대 소위 골드 러쉬로 인한 중국인의 대거 유입 이후에는 빅토리아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에 대한 선교가 제3의 선교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조직된 지 약 30 여년 후인 1889년 데이비스를 한국에 파송하게 되는데, 이때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선교운동에 영향을 몇 사람의 영웅적인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존 게디(John Geddie), 하겐아우어(F. A. Hagenaur), 존 페이톤(John Paton, 1824-1907) 같은 선교사였습니다. 특히 페이톤의 선교사역과 활동은 빅토리아 교회의 선교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1865년 강연과 집회를 통해 호주 교회에 선교에 대한 각성과 선교적 책임을 환기시켜 주었고, 유능한 선교사들을 발굴하는 계기가 됩니다. 후일 부산에 와서 나병환자들을 위해 일한 매켄지(매견시,J. N. Mackenzie), 마산 창신학교 2대 교장을 지낸 리알(라대궐,D. M. Lyall), 마산에서 의신여학교 월영유치원에서 가르치며 문창교회 주일학교 와 반주자로 일한 엘리스(C. Ellis) 등은 페이톤의 영향으로 선교사로 자원하였던 이들입니다.
1913년 진주에 세워진 ‘배돈병원’은 페이톤의 아내였던 마가렛 화이트크로스를 기념한 병원(Mrs. Margaret Whitecross Paton Memorial Hospital)이었습니다. 페이튼이라는 이름을 한국말로 배돈으로 불렀던 것입니다.